Page 4 - 2019 한인총연합회 필리핀 한인 이주사 회보집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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대한민국과 필리핀이 외교관계를 맺은 1949년 3월3일                  유타야Ayuthaya 왕국과 교류가 있어 남양지역과의 교류
            을 기준으로 올해가 한-필 수교 70주년이 되는 해로 주필                 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. 또한 자바Java의
            리핀한국대사관에서 주최하는 행사, 교민사회가 주최하는                     마자파히트Majapahit 왕국의 상인도 왕래하였다는 기록을
            행사 등 다양한 7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진행했다.                     볼 수 있다. 그렇지만 조선왕조의 대외정책 기조가 쇄국이
              필리핀에 거주하는 한인동포들은 지난 2017년 93,093                었기 때문에 동남아지역과 적극적인 교류는 거의 없었다.
            명에 비해 8.5% 감소했지만, 한인들이 필리핀과 인연을                    다만 중국에 간 사신들을 통해 필리핀呂松國, 현재의 필
            맺기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수백년전을 거슬러 올라가야                     리핀 루손섬, 말라카滿刺國, 참파占城, Champa, 베트남安
            한다.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南 등에 관해 들은 것이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. 예컨대
              중국인들은 동남아지역을 ‘남양南洋’이라고 불렀다. 송                   유명한 실학자 이수광李睟光이 1598년 명나라 연경에 사
            대宋代까지는 ‘남해南海’라는 이름이 일반적이었다. 원대                    신으로 갔을 때 안남 사신 풍극관馮克寬을 만나 필담을 통
            元代부터 청대淸代 중기까지는 동남아시아South-East                   해 알게 된 안남의 풍속과 제도 등을 상세히 『지봉집芝峰
            Asia, 이하 ‘동남아’로 약칭를 두 지역으로 나누어 필리핀                集』에 소개하였다.
            과 보르네오 등은 ‘동양東洋’, 베트남을 비롯한 서쪽지역은                   동남아지역과 직접적인 교류에 대한 우리측 기록은 해난
            ‘서양西洋’이라고 하였다. 18세기 중반에는 위에서 언급한                  사고로 인한 표류자들이 동남아지역에 갔었다는 기록이
            동양을 동남양東南洋, 서양을 남양南洋이라고 하다가, 일                    남아있지만 표류하여 도착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주와는
            본인들이 명치유신明治維新 이후 아시아를 ‘동양’, 유럽을                   별개의 문제였다.
            ‘서양’으로 호칭함에 따라 ‘남양’은 동남아지역만을 지칭하                   항로를 이탈한 한국인들 가운데 베트남까지 가는 경우가
            게 되었다.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있었다. 1687년 9월 제주濟州 진무鎭撫 김대황金大璜과
              우리나라에서도 이들 지역에 대해 일반적으로 중국이나                    사공 이덕인李德仁 등 24명이 제주목사가 진상하는 세 필
            일본에서 전해진 바에 의해 ‘남양’이라고 불렀다. 그러나                   의 말을 싣고 출항하였다가 표류하여 안남국 호이안Hoi-
            동남아지역과 우리나라 사이에 언제부터 직접적인 왕래                      an, 會安府에 도착하였다. 이들은 표류한 지 16개월만에
            가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참고할 만한 자료가 별로 남                    서귀포로 귀환한 기록이 있다.
            아있지 않기 때문에 역사적 실체에 접근한 연구는 거의 없                    또한 1727년 8월 15일에는 전라도 나주 영산포를 떠난
            다.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김백산 등 30여 명이 표류하다가 대만의 창화彰化 대돌두
              1940년대 한국과 베트남간의 접촉과 문화적 교류를 연                  大突頭에서 발견되었다. 동남아지역으로 표류한 내용을 적
            구한 김영건金永鍵 에 의하면, 1220년대 베트남에서 정                   은 대표적인 기록은 『표해록漂海錄』이 있다.
            변이 일어났을 당시 망명, 고려로 귀화하여 화산이씨花山                     『표해록』은 신안 우이도에 유배되어 있었던 정약전丁
            李氏의 시조가 된 베트남 왕자 리롱뜨엉李龍祥에 대한 이                    若銓이 우이도의 어상魚商 문순득文順得으로부터 1801년
            야기가 전하고 있다. 그렇지만 신빙성 있는 역사 자료로는                   부터 1805년까지 3년 2개월간 표류한 견문을 듣고 기록한
            확인되지 않는다. 『고려사』와 『조선왕조실록』에 기록                     것이다.
            된 동남아지역과 관계는 여말선초에 시암Siam, 暹羅의 아




















               중국으로 가는 길에 또 풍랑을 만나. 유구국보다 더 남쪽으로
             떠내려가 스페인 식민제국령 여송(呂宋, Luzon : 루손 섬)이라
             는 곳에 표착. 이 과정에서 조선인 일행들은 뿔뿔이 흩어지고,
             문순득은 여송에서 9개월을 지내면서 여송 언어를 마스터한
             다. 유구국에서는 식량과 의료를 지원받으면서 나름대로 편하
             게 지냈던 반면 여송에서는 그런 게 전혀 없어서 자기 힘으로
             살아가야 했는데, 문순득은 끈을 꼬아 파는 것으로 생계와 용
             돈(술과 담배)을 해결했다고 한다. 그렇다고 마냥 일만 한 것은
             아니고 투계를 구경하거나 현지 성당을 방문하는 등 나름대로
             다양한 체험을 하며 지냈다고 한다.
               그 후 1803년 8월 여송에서 마카오 상선을 얻어타고 중국 마
             카오로 이동한 문순득은 육로를 통해 난징과 베이징을 거쳐
             1804년 12월 조선 한양에 도착하고, 마침내 집을 떠난 지 3년
             2개월만인 1805년 1월에 고향인 우이도로 돌아오게 된다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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